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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異山 戀歌

그래도 해야만 하는 산행(천왕봉/일출봉 능선편)

by 청산전치옥 2012. 2. 14.

 

그래도 해야만 하는 산행(천왕봉/일출봉 능선편)

 

 

 

-산행일: 2012. 2. 7

-산행코스: 중산리~천왕봉~중봉~장터목~일출봉능선~중산리

-누구랑: 연하선경. 풍경소리. 돌팍

 

 

 

새벽3시 마빡에 불 밝히며 아무도 없는 적막한 산 길을 걷는다.

이따금씩 내리는 흰눈깨비를 맞으며 초연한 모습으로 묵묵히 고도를 높인다.

어제 내린 비로 등로는 미끄럽지만 버텨 견딜 만 하는 산행인가 싶더니

망바위를 지나고부터 발목에 체인을 동여 메고 거친 바람을 맞으며 숨을 헐떡인다

 

 

 

 

법계사의 아련한 불빛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일단 바람을 피해 로타리 화장실로 들어갔다.

냄새가 좀 역겨웠지만 그래도 이만한 바람을 피해줄 공간이 이곳 아니면 어디 있겠나

군 훈련시절 화장실에서 남 몰래 먹었던 눈물의 빵이 생각났다

오늘 이곳에서 먹는 빵과 아침 간식은 또 다른 맛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차라리 그냥 이곳에 머물러 있었으며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고도를 올릴수록 눈()높이는 달라지고 있었다.

때로는 무릎까지 쌓인 눈을 러쎌하며 오르는 우리가 마치 어떤 철인처럼 돼 보였다.

 

 

 

 

7시 조금 못되어 천왕에 몸을 안쳤다.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바람에 못 이겨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만다.

중봉으로 가자던 내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그 동안 아무 말없이 따라준 연하선경님이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신다.

자신은 장터목에서 기다릴 테니 다녀오라는 내용이고 보면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그 놈의 사진 욕심 때문인지 중봉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하늘은 열릴 기미가 없고……

아뿔싸~~

앞서던 풍경님 러쎌하면서 잘못 들어선지 모가지까지 눈이 파묻히고 마는 거다 ㅎㅎ

그냥 되돌아 가자는 말에 아무 반응도 없네. 선두 교체 후 나를 따르라……

 

 

 

 

 

중봉에 도착한 시간이 725

카메라를 꺼 내야 하는데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바람과 추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진하기에 아침 빛이 너무도 빈약한 여명이다.

무뎌진 손가락을 비비며 카메라를 꺼내면서 빛을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중봉에서 시간, 1시간을 소비하고 뒤를 남긴다.

 

 

 

 

모처럼 아무도 없는 한가한 천왕봉 남 사면에 몸을 맡긴다.

북풍을 막아주는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남 사면의 설경에 도취된다.

아직도 잿빛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저 구름 한 줌 거두어 바람과 함께 날려보내고 싶다.

나뭇잎 다 떨궈버린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칼 바람 타고 날아온 눈들이

켜켜이 속눈썹처럼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자연의 이치가 경이롭기 그지 없구나

해가 떠오르니 먹구름은 걷어 갔지만 아직도 칼 바람은 앞 고름을 파고 스며든다.

 

 

 

 

탁 트인 설경의 조망은 좋으나 그럴 찰나의 여유를 느끼지 못하고 상봉을 뒤로 남긴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파(寒波)를 참아내기란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날씨는 언제나 내편이 아닌 불공평하다고 푸념을 늘어놓던 나

오늘도 예외는 아니구나

무딘 가슴으로 칼바람을 맞으며 초연한 듯 묵묵히 걷는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제석봉을 지켜온 고목의 주목들은 과연 천 년을 살았을까.

칼바람 앞에 처연히 부르르 떨고 있는 저 고목들조차 안쓰럽기는 매 한가지다.

세월이 흐를수록 고목의 개체 수는 더욱더 줄어들 테고

만고의 풍상을 대변하고 웅변하는 저 고목들 옆에는 삭은 풀들이 바람 앞에 누워 있다

 

 

 

 

* 해후상봉(邂逅相逢)*

장터목에서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다는 선경님과 해후상봉(邂逅相逢)이랄까

천왕봉 별리(別離)의 아픔을 뒤로하고 갈라졌던 우리,

우리와 선경님은 서로를 배려하며 아쉬움으로 점철된 그 어둠에서의 순간이었지만

중봉에서 이곳까지 올 때 오히려 미안해하는 우리의 마음은 알고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10시가 넘어서까지 아침을 먹지 않고 기다려 주신 고마움과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해주신 떡국 정말 잘 먹었습니다.

 

 

 

 

*바람 잡는 두 사람*

추위와 배 고픔에서 벗어난 해방감이랄까

돌팍과 선경님이 바람을 잡으며 일출봉능선으로 가자며 은근히 바람을 넣는다.

눈과 바람 때문에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는데 앞에서 자기들이 러쎌하겠다며……

기다림의 보상차원도 있고 하여 어쩔 수 없이 일출봉능선에 몸을 담그는데

결국은 일출봉 산행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말았다.

함께한 사람 모두가 코끝과 귀볼 그리고 나는 손발가락에 가벼운 동상을……

 

 

 

 

12시에 시작한 일출봉능선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그 언젠가 톡목님과 함께 했을 때도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건만

그 상처를 다시 안고 모험으로 도전한다는 생각에 능선을 가 보지만 왠지 자신이 없다.

몇 개의 능선을 넘고 넘으면서 시계는 벌써 5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 때처럼 전망바위 안부에서 적당한 곳으로 내려설 요량으로 사진 몇 컷을 하는 사이

선두는 벌써 내 시야에 멀어지고 말았다.

에라~ 모르겠다, 가는데 까지 가 보자……

 

 

 

 

*사진이냐 산행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차피 무게의 압박 때문에 두 가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소의 배낭무게에 5kg을 더 짊어져야 한다는……

오늘도 20여분의 사진을 위해 15시간 동안 삼각대와 여분의 렌즈를 갖고

더군다나 한끼의 식사를 날리는 바람에 괜한 무게의 고통이 배낭 속에 그대로 있다

 

 

 

 

일출봉을 들어선지 6시간 만에 중산리 시외버스 터미널 앞으로 떨어지면서 하는 말

청산님, 너무 하신 것 아녀요

그들과 오늘 처음 산행하는 선경님과 풍경님 말씀처럼

신고식을 단단히 치른 혹독한 댓 가의 산행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제 산행이냐 아니면 사진이냐를 두고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다고……

15시간 산행에 동참 해 주신 돌팍님 풍경님 그리고 선경님 수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나를 다독이고,

또 내게 용기를 주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산행기를 마칩니다.

 

 

2012. 2. 7

청산 전 치 옥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