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진 시공간의 혼재 속에 태어난 설화(2)
현재의 달궁 야영장
< 달궁(月宮)은 어디에 >
전북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德洞里) 달궁(達宮)마을. 마한 왕의 별궁이 있었다고 하여
달궁으로 불리어왔으며, 1914년 이전에는 남원군 원천(현 주천)면에 속하였다가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산내면 덕동리와 병합되었다(신운성지, 1997).
주차장과 야영장 사이에서 무성한 수풀에 가려 그 존재마저 잊혀진 달궁 터는 퇴락한
안내판만큼이나 관심의 대상에서 외면되어 온지 오래다.
지방자치단체 마다 소설과 전설 속의 인물마저 관광 상품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추세에
비춰볼 때 지리산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궁터가 어쩌면 저리도 철저하게 방치되어
오는지 의문이다. 그 흔한 유물 전시관은 고사하고 주춧돌을 비롯한 발굴 흔적과 단정한
관리의 손길마저도 찾을 길이 없다. 이는 전설과 간접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
역사적 실증 자료가 전혀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무관심이다.
마한왕조에 대한 첫 언급은 서산대사가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으면서 전해 오는
달궁 전설을 글로 남긴 황령암기에서 시작된다.
이후 운성지와 용성지 등에서도 청허당집을 인용하였을 뿐 뚜렷한 근거는 남아있지 못하다.
1915년 어윤적은 ‘동사연표’에서 마한의 6대 효왕이 정유년에 도읍을 지리산 반야봉
아래로 옮겼다(丁酉移都智異山般若峰下)고 기록했지만, 이 또한 논증할 수 없는
문헌상의 내용을 가지고는 실제 역사로 간주할 수 없기에 어려움이 따른다.
전북대 발굴팀은 80년대 후반에 주차장 건설 당시 일부 유물이 발견되면서 일대를 발굴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삼국기 것이 혼입되어있는 약간의 와편과 토기편을 수습했다.
군데군데 돌담과 초석으로 보이는 자연석괴가 있으며 흘러내린 돌 사이에서 출토되는데
유물 포함층이 얇다. 현 경작토층은 10cm 미만, 산쪽으로는 퇴적층이 두터워 산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파악된다. 궁터로 인정되지 않으며 서쪽에 자리한 산에서 흘러내린
유물로 파악된다"고 기록되어 있어 궁터가 정령치 부근 등 다른 곳에 존재했을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남원 지방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 1987 전북대 박물관).
들어간 어느 날 밤, 심원계곡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달궁 마을을 덮쳤다.
마을 앞 정자나무 위쪽에서 농가 세 채가 떠내려가고 논밭이 무너져 피해가 컸다.
다음 날 사람들은 200m 아래의 왕궁터에서 냇물에 휩쓸려 패인 왕궁터를 보고 모두 놀랐다.
거기에서 나온 다섯 아름의 귀목나무 그루터기와 새카맣게 변한 감나무는 둘레가
네 아름이 넘었는데 썩지 않고 있었다. 직경 1.5m 정도의 질그릇 시루 한 개, 수십 개의
질그릇과 접시, 형태만 남은 매우 커 보이는 놋쇠 가마 한 개, 청동제로 보이는
숟가락 수십 개, 동경 두 개, 활촉 같은 쇠붙이가 헤쳐진 땅속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가운데 완전한 것은 질그릇 접시 몇 개 뿐이고, 쇠붙이는 녹이 슬고 삭아있었다.
지금 확실한 기억은 없으나 그때 접시 등 완전한 것은 산내주재소 일본인 순사부장이
와서 가지고 간 것 같다(
부족하나마 유물이 고증되지 못하고 소실되었음에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더불어 또 다른 내용으로 "1960년 봄. 정령 일대는 일본 훗까이도산 사탕무우 재배지로
개간되고 있었다. 서울의
농림부로부터 이곳 국유지 50만평을 임대계약하고 일꾼을 모았다. 남원군 산내면 덕동리
산 215번지에 해당되는 임야가 3년간에 개간되면서 인부들의 막사 10여 동이
산 중턱에 세워지고 사탕무우가 심어졌다. 전문 학자들과 농림부는 사탕무우 재배의 천혜의 적지라고 손뼉을 쳤다.
임씨 부자는 의욕에 부풀어 서울 충무로에 있는
그들의 3층 빌딩을 팔아 보태고 '지리산개발 사탕무우 정착농장'을 설립했다.
궁민 구호양곡으로 밀가루 수천부대를 지원받아 노임으로 나눠주고 일꾼들을 끌어들였다.
산길이 극히 어려운 산마을 사람들이 새벽부터 모여들어 연인원이 145,800여 명이나
투입되었다. 1963년 가을 수확 예정으로는 3만 4천톤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정령의 수비성터와 그 일대 10여 만평도
그때에 모두 농장으로 파헤쳐졌다. 성터에서 옛 질그릇, 동제 칼집, 쇠화살촉이 더러 나왔다.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여 감정을 해본 사람이 없었던, 아쉬움만 여기서도 남겼다.
정령일대가 초원이 된 것도 그때에 나무를 베어버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일대 초원
아래에는 15년 전에 영림서에서 심은 잣나무 2천 그루가 자라고 있을 뿐 개간지는 본래의 산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고증의 기회를 놓친 훼손의 안타까움을 얘기했다.
하지만 눈여겨 볼 사료 중의 하나로 여지도서에 "신해년(영조 7, 1731년)에 한물이 지고
사태가 반야봉에서 무너져 내려와 마을 전체를 뒤덮어 묻어버림으로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어쩌면 당시 대규모 산사태로 인하여 지표층이 모두 쓸려내려 갔거나,
반대로 밀려온 토사가 기존의 유물층을 메움으로 인하여 새로운 지표층을 형성해
제한된 발굴로 마무리 되었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경우는 정령치 일대의 유물이
산사태 때 쓸려와 경사가 완만해진 달궁 지역에 퇴적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퇴적된 유물은 어디서 온 것일까? 현재 알려진 달궁이 궁터가 아니라면
피난왕조의 궁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희미한 끈을 찾아가는 중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록을 접할 수 있어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말았다. 1900년 대 초 실상사 주지 등을 거쳐 동국대와 원광대 학장을
역임했던 포광
'한국 불교사상 논고(원광대 출판국, 1984)'에 실린 "남원의 구절령(九折嶺)과
達空寺"에서는 "한살이 두 살이 아홉 살이를 돌아가는 도중에 옛날에는 유명한 달공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찰되고, 달공리라는 촌부락이 되고만 것이다...
그 옛날 달공사가 즉 신라 금악가 옥보고의 운상원이라 하여...
황령사의 뒤에 정령과 황령이라는 두 개의 재치가 있었음으로 황령사라고 寺名을
부쳤다는 기사가 있는데, 지금 이 황령사의 유허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그 근거에 寺對하여 주민들은 황령사의 유허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지만은
지금 그 절터의 뒷산을 황령재라 정령재라 하는 이름을 주민들이 부르고 있으니
이 절터가 분명히 황령사의 절터인 것을 推想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달궁(達宮)마을의 어원이 동일한 한자 표현인 달공사(達空寺)라는 절에서
유래되었음을 얘기해줌으로서, 마한 왕조의 별궁인 '달의 궁전'과는 거리가 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지금껏 알려진 달궁(達宮)의 지명은 "월지궁(月支宮)의 '월지'를
훈차한 '달지'에서 '支'가 생략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궁(宮)은 단순한 읍이 아니라
도읍지를 의미한다. 즉, 월지궁 → (훈차) → 달지궁 → '지'탈락 -> 달궁(다시 보는
남원의 전란사, 2001)"과 전혀 다른 유래를 가지고 있음이다.
황령암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 결과, 달궁 일대에는 내성과 외성이라는
이중 구조의 성곽이 형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외성은 잘 알려진 대로 정령치
일대의 토성과 일부 석성으로 고리봉을 거쳐 자연 지형을 이용해 세걸산까지 이어지고,
다시 정령치에서 만복대를 경유하여 묘봉치에 이르는 능선은 외곽의 급경사를 이용한
천혜의 자연 방어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내성은 버드재 일대의 토성으로 능선과 사면을
이어 형성되어 있으며, 자연지형을 이용하기 위한 일부 석성 구조물이 보강되어 있다.
이는 버드재의 '성가'라는 지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곽이 마한 부족국가에 의해 축성되었다면, 현재의 달궁 터에서 옛 군사들은
어떤 통로를 경유해 수비성에 닿을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그 의문은 금세 풀리고 만다. 오래전부터 달궁 사람들은 남원과 산동,
구례를 오가는 산길과 고개를 가지고 있었다. 남원은 언양골를 따라 정령치에 오른 다음,
다시 골짜기를 따라 주천 고기리로 넘어갔다고 한다. 산동 방향
또한 버드재에서 새목재를 이어 산사면을 따라 묘봉재로 넘어서 급경사를 내려갔다고 얘기한다.
구례는 작전도로가 나기 전부터 돌고개와 아홉사리를 통해 성삼재를 넘어서 다녀왔다.
이들 모두가 예부터 활용되어온 군사도로이자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주민들의 생활 현장이었다. 또 한가지 추정은 달궁에서 직접 능선을 따라 만복대로
이어지는 매우 부드러운 능선을 꼽을 수 있다.
성곽의 축성 연대가 불확실하여 미력하나마 추정에 불과하지만,
마한 부족국가 당시에 축성한 성이라면 내성과 외성을 갖춘 달궁 일대가 유력한
궁터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후인 가야나 신라 시대에
백제 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이라면, 피난 왕조로서의 마한 부족국가의 도성은
정령치 일대나 만복대 남사면으로의 확장도 조심스레 고려해볼 수 있겠다.
아직은 희뿌연 안개속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실마리가 드러나지 않을까?
(^_^) 지다람 / 윤 재정
**지다람님은 제가 알고있는 지인으로서 지리산의 역사와 흔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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