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진 시공간의 혼재 속에 태어난 설화
< 들어가며 >
전문교육을 받은 역사학도가 아니면서 오래도록 잊혀진 과거를 추정 해 나가기란 결코
쉽지 않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관심 있는 자로서 난마처럼 얽혀있는 이야기를 그저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 것
또한 무책임한 자세인 것 같아,
우선 몇 가지 문제제기를 통해 해결 가능성을 모색해 보는데 만족하기로 한다.
모두들 지리산 개산의 역사는 서산대사의 청허당집에 실린 ‘황령암기’에 수록된 내용을 근거로
마한의 피난왕조를 앞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먼저 1500년 대 중
후반에 쓴 그 기록을 옮겨보면, “동해에 한 산이 있으니 이름은 지리산이라 하고,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은 반야봉이라 하며 그 봉우리
좌우에 두 재(嶺)가 있으니 이름은 황령과 정령이라 한다
(東海中有一山 名智異山也. 山之北麓有一峰名般若峰也. 峰之左右有二嶺 名黃與鄭也.).
옛날 한나라 소제(기원 전 87 ~ 74)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황,
정의 두 장군을 시켜 공사를 감독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재를 이름하고,
도성을 72년 동안 보호하였다.
그 뒤 신라 진지왕 원년(576년)에 운집대사가 중국에서 나와 황령 남쪽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따라 황령암(黃嶺庵)이라 하였다.
그 암자의 규모는 가운데 황금전이 있고 동쪽에는 청련각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옥교가 있어
꽃과 대나무가 서로 비추어 그 그림자가 금지(金池)에 떨어지면
마치 안양세계(* 극락세계)와 비슷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위 내용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쉬운 접근은 황 장군과 정 장군의 성씨 유래다.
‘한국의 성씨(이 수건 저)’에 의하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시대부터 성씨를 쓴 것처럼
보이나 이는 모두 중국문화 수용 뒤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록에 성씨가 등장하는 예로서 신라 금석문에도 7세기 전에는 성을 쓴 사람이 없고,
고구려는 장수왕 때에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 씨가 등장한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 여 씨, 무왕 때 부여 씨를 사용했으며,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비로소 김 씨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의 고씨, 백제의 부여 씨, 신라의 박, 석, 김 씨 외에
제 3대 유리왕 때 6부(이, 최, 정, 손, 설, 배)에 성씨를 부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신라 6성의 대두 시기 또한 신라 말 이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씨족적 유래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으나 본격적인 한자 성이 수용된 것은 한참 후인
7세기 이후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기원전에 정 장군과 황 장군의 성씨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그 후손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두 번째 문제는 ‘성을 쌓고 도성을 보호하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고산지 벼농사 기술은 더욱 취약하여 조, 기장 등을 중심으로 한 미천한 농업생산력의
시기에는 일정한 농토와 인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지리산지 농업과 촌락연구,
조직이더라도 500 ~ 1,000 명 정도의 인구는 필수적이다.
안타깝게도 달궁, 버드재, 덕동, 이동, 학천 일대의 대지와 경작지로는
이 많은 인원을 수용할만한 넓이가 보이질 않는다. 그들은 부족한 식량을 어디에서 보급 받은 것일까?
지금의 운봉과 산내 일대에서 식량을 지원받았다면 피난 왕조로서 기존 세력과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갔을까?
세 번째는 황령암 건립 연대(576)에 대한 의문이다.
중앙집권체제가 약한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진흥왕 대(540 ~ 576)에
유학 승려가 귀국하고, 경전이 도입되는 등 왕권의 강화와 함께 빠른 성장을 한다.
하지만 지방은 여전히 토착 민간신앙을 숭배하는 호족세력에 의하여 경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는 정도였다.
공식적인 최초의 신라 사찰은 진흥왕 5년(544)에 세워진 흥륜사와 영흥사이며,
그 뒤 황룡사(진흥왕 14년)가 세워졌다. 또한 초기 사찰은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신라 말에 선종이 도입되면서 풍수지리와 교종의 압력 등으로 인하여 경전연구와 참선수행하기
좋은 산으로 찾아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상사와 화엄사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576년 당시의 달궁 일대는 어떤 역학관계에 얽혀 있었을까?
피난 왕조인 마한의 부족국가가 소멸되면서 토착민이었던 변한에 자리를 물려주고 뒤이어
가야세력으로 변천되었을 것이다.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가 532년에 신라에 합병되고,
지리산 북부지역의 실제 지배세력인 대가야가 562년에 신라에 정복당하면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때부터 운봉지역을 둘러싼 백제와 신라의 세력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무왕 17년(616) 백제에 점령되기 까지 기존의 성곽이 보수되고 신축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당시의 상황으로 추측컨대, 대가야의 멸망과 함께 신라에 흡수되었지만 토착신을
숭상하는 지방 세력의 힘은 여전히 건재하였을 것이고, 백제와의 세력 다툼에 의한
살벌한 긴장관계 속에서 실상사 건립연대(흥덕왕 3, 828년)보다 훨씬 빨리 황금전과
청련각, 백옥교를 갖춘 암자의 입산은 아무래도 시대상황과 동떨어진 면이 많다.
청허당집에 각각의 연대와 기간이 선명하게 기록된 것으로 봐서 조작된 이야기는
절대 아님을 알 수 있다. 과연 이런 혼란은 어떻게 비롯된 것일까?
사실 숙제는 이제부터 시작된 것이다. 지금 당장 답을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위의 기록들은 모두 실재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오래 전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이 황장군으로 불려온 것처럼, 다만 각각 개별로 있었던
사건들은 시간과 공간이 허물어져 뒤엉키면서 동일한 시대를 반영하는 설화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볼 뿐이다.
마한의 한 부족국가가 난을 피해 수십 명의 무리를 이끌고 달궁이나 정령치로 피신하여
궁과 성곽을 세웠다가 소멸되었으며, 수백 년이 지나서 신라가 가야로부터 흡수한
운봉 일대에 가야성을 더욱 보강하여 백제를 방어하기 위해 정 장군과 황 장군을 파견했다.
황령암은 선종이 세력을 키워가는 신라 말 실상사의 말사로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해보면 무리일까?
(^_^) 지다람 / 윤 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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