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집 역사의 혼란 >
지리산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절집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역사적인 배경과 동떨어진
창건설화를 접할 수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특히 절집 중수기가 많이 남아있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조금은 과장되고 부풀려진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또한 당시 불교가 처한 시대적인 상황과 무관치 않음을 엿볼 수 있다.
지리산 자락에서 기록으로 볼 때 가장 먼저 창건된 사찰은 단연 화엄사라고 할 수 있다.
화엄사의 자료에 따르면, "백제 성왕 22년(544)에 부처님의 나라 인도에서 온 연기스님에 의해서 창건된 천년의 고찰이다.
이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셔와 4사자 3층석탑(불사리공양탑)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 후 의상대사가 화엄사에 주석하시면서 문무왕 10년(670)에 3층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면을 화엄석경으로 둘렀는데 이로써 화엄사는 대도량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화엄사 경내에서
하지만 이는 조선시대 중관이 기록한 사적기 내용 '신라 진흥왕 5년(544)'을 당시
지배세력의 상황에 맞춰 최근 '백제 성왕 22년'으로 수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백제의 불교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해 도입되어 부여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으며, 무왕 때인 7세기 초에야 비로소 인근 익산에 미륵사가 건립됨에서 보듯이
가야와 국경선을 접한 지리산자락에 세워진 절집은 너무 이른 시기임을 알 수 있다.
한국 불교에서 화엄사상을 일으킨 고승을 원효, 의상대사(625 ~ 702)로 본다면
어느 정도 조정이 가능해진다. "연기조사는 경덕왕 14년(755)에 만들어져 현재까지
전해오는 신라 '화엄경 사경'의 조성을 주도한 8세기의 고승이다.
이 화엄경 사경은 황룡사의 연기조사를 중심으로 서울인 경주의 핵심제자들과 전라도
지방의 실무자들이 참여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연기문에서 밝히고 있다.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편찬한 '신편제종교장총록'에는 연기의 저술로 5가지를
들고 있는데, 시대에 따라 저술을 나열하는 '교장총록' 체제에 따르자면 8세기 중반의
사경 연대와 일치한다. 그리고 의천은 화엄사에 와서 연기조사의 뛰어난 전교활동을
시로 읊기도 하였으니 의천이 파악한 연기조사는 8세기 중반경의 인물이 분명하다(호남의 불교문화와 불교 유적, 1998)."
포광
사제관계를 뒤바꿔 놓은 중관을 호되게 질타함을 찾아볼 수 있다.
전후 상황으로 볼 때 화엄사의 건립 시기는 8세기 중반으로 크게 늦춰짐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써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하는 인근 사찰의 건립시기 역시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연곡사, 사성암, 대원사 등이 대표적이다.
다음으로 오래된 절집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황령암(진지왕 원년, 576년)"을 들 수 있는데,
당시 백제와 신라의 역학관계 및 토착신앙에 근거한 호족의 압력과 선종의 전래시기를
감안할 때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 이야기는 베일을 벗어가는 황령암지의 추정과 함께 다시 다루기로 하자.
마천에서 백무동으로 향하기 위해 옛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급하게
오르는 길을 택하면 다랑이 논으로 유명해진 도마동에 닿게 된다.
그 전에 만나는 동네가 군자마을인데, 왼편으로 무성한 대숲 속에 옛 "군자사"가 흔적만
간직한 채 숨어있다.
유몽인이 1611년 지리산에 든 기록인 '유두류산록'에 따르면, "저물녘에 군자사(君子寺)로 들어가 묵었다.
이 절은 들판에 있는 사찰이어서 흙먼지가 마루에 가득하였다.
선방(禪房) 앞에 모란꽃이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어 구경할 만하였다.
절 앞에 옛날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靈井寺)라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라 하는데, 무슨 뜻을 가져온 것인지 모르겠다."
그 후 1643년에
"저녁에 군자사(君子寺)에 도착하였는데 절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靈井寺)’이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여기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군자사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대전(大殿)과 방옥(房屋)이 모두 매우 크고 화려하였다. 절 서편에는 새로 지은 별전이
하나 있었는데 금빛과 푸른빛으로 화려하게 단청을 칠하였으며 ‘삼영당(三影堂)’이라 하였다.
당 안에는 청허(淸虛, * 휴정 서산대사), 사명(四溟, * 유정), 청매(靑梅, * 조선 선승 이오) 세 대사의 진상(眞像)이 있었는데,
촛불을 가져다가 우러러 보니 서로들 부드러운 말을 주고받는 듯하였다."
한참 뒤인 1790년 이동항의 '방장유록'에서는 "이 군자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왕비의 원당(願堂)이었다.
왕비가 이 절에 거둥하였을 때에 태자를 낳았기 때문에 절 이름을 ‘군자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함양군지'와 '간추린 함양의 역사(2006)'에 기록된 군자사 창건기록을 훑어보면,
진지왕 3년(578)에 왕위계승의 혼란을 피해 지리산 자락에 은거한 진흥왕의 적손
진평왕(재위 579 ~ 632)이 여기에서 태자를 낳았고, 다음 해 화백회의에서 음란한 생활
등의 문제로 퇴출된 진지왕(진흥왕의 차남)의 뒤를 이어 환궁하면서
이곳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위의 자료를 살펴보면, 1611년 유몽인보다 30여년 후에 찾은
당시에 구전되어오던 진평왕 관련 설화를 유몽인은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임진왜란 후 사회가 안정화를 찾아가면서 몇 가지 이야기가 얽혀 새롭게 윤색된 설화가 탄생한 것일까?
한술 더 떠 진평왕의 태자 탄생 설을 어찌 받아들여야할 지 난감하다.
사서에 따르면 진평왕은 아들이 없어 선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태자 사망 설에 대해서도 거론을 하지만 이 또한 무리한 추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흥왕의 장남이자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가 진흥왕 33년(572)에 서거하였고
576년 진흥왕 사후에 적손인 진평왕이 왕위를 계승하여야 하나,
거칠부 등에 의해 주도된 삼촌(진지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진평왕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지리산 자락으로 피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왕산과 왕등재, 추성,
두지터, 군자사 등이 구형왕과 더불어 진평왕의 설화와 함께 여전히 시공간을 떠돌고 있다.
여느 절집과 마찬가지로 지리산 자락에 흩어져있는 사찰들의 창건설화 또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끝없이 각색되고 윤색되어왔음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성리학의 발전과 이로 인한 사대부의 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의 위기의식이
심각해져가는 가운데, 임진왜란 등의 혼란으로 더욱 피폐해진 조선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역사 과장과 부풀리기는 비단 지리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더욱 심해진 경향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아직 까지는 정확한 역사 기록에 기반을 두지 못하고 인용에 의존하거나
추정에 근거한 옛 기록들은 계속해서 지켜보며 평가하는 여유를 가져야할 것 같다.
(^_^) 지다람 / 윤 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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