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촛대봉의 가을마중
살다 보면 그렇게 밀려오는 욕망이 있다. 일기와는 상관없이 나에게는 또 하나의 기다림 의도적으로 할 만큼 어디로 떠나고 싶은 욕망은 끝이 없다. 때로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좀처럼 그칠 줄 모르는 비는 심한 폭우까지 동반했었다. "꼭 가야만 하나" 새벽에 날아온 비보(悲報)처럼 혼자 중얼거린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이해하려 들 때면 어떤 무엇 보다 더 날카로운 시간도 나의 빈틈을 허용할 수 없었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저 구름 뒤에 넘어야 할 산이 몇 개나 되는지……
-일시: -어디를: 지리산 촛대봉 -누구와: 늘푸른님. 반야봉님. 원시인님. 이중위님. 일락님부부. 서부기님.
요즘처럼 일기예보에 민감한 적도 드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쉬는 날 연속에서 비가 온다는 예보이기 때문이다. 진작부터 비박산행 계획을 잡아놓고 이제 취소해 논 상태이기도 하다. ‘원시인 아우, 산행 취소 해 버릴까’ 하고 핸폰을 울려보는데 “아녜요. 비가 오면 더욱더 좋은 곳이 있어요” 라고 오히려 흙 묻지 않은 코스도 있단다. 참! 믿어도 되는지 원~~ 산행 하루 전 갈팡질팡 어찌할 줄 모르다가 이내 결심으로 굳어진다.
쿵쾅거리며 창문을 흔드는 무서운 비바람에 잠에서 깨어난다. ‘아~이 좀 더 자야 되는데……’ 하면서 눈을 붙여 보지만, 몇 번을 뒤척이다가 아니다 싶어 일어났을 때 아내도 이미 눈 떤 상태에서 “이러는데도 산에 갈 거야” 하는 말에 대꾸를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꼭 가야만 하나……’ 간밤에 날아온 悲報처럼 중얼거리며 준비해준 도시락을 챙기면서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나선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경비실 앞에서 우산으로 배낭을 가리며 눈 이사를 건넨다.
일락님부부와 반야봉님과 함께한 우리는 비 오는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일행인 원시인 아우에게서 “형님, 천왕봉으로 갑시다” 라는 핸폰이 울린다. 이심전심이라 생각되었던지 나도 모르게 ‘그러면 그렇지’ 하고 되뇐다. 오랜만에 주 능을 거닐면서 푸른 하늘에 야생화를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대의 승용차는 진주를 지나고 중산리를 다 와 가는데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무명교 세석 가는 길에서 응급처치 중
“출입이 안됩니다. 입산급지 입니다” 라는 천청벼락 같은 소리를 듣는다. 행여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시간을 아끼겠다는 심보로 법계사 버스를 이용한다는 생각도ㅋㅋ 잠시 망설임이 이어지다가 거림으로 전화를 걸어 본다. 다행이 그 쪽에 허용된다는 소식에 거림으로 차를 내 몰고 서브기는 우산을 쓰고 나는 우의를 입고 스패츠를 찬 사람 등 제 각각 특별한 산행이 이어진다. 그렇게 여유만만하게 이어 진가 싶더니 정주님이 어딘가 몹시 좋지 않은 모양이다. 다행히 간단한 구급약과 근육이완 조치를 하고 나서 좀 여유가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광주에서 오신 늘산님 일행과 합류하기에는 버거운 시간이 되어 버렸다. 여유 있는 산행을 하자. 비록 비는 내리지만 볼 것 다 보자며 쉬엄 쉬엄 거닐어 오른다. 등로가 계곡이 되어 작은 폭포를 이루고 거림골의 계곡물이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다. 세석교에 왔을 때 아직도 짙은 운무는 걷힐 줄 모르고 왔다가 도망가기를 반복한다. 아마 많은 것을 숨겨두고 천천히 조금씩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속셈이다. 지난주 이곳을 다녀간 우리들인데 이곳 야생화의 흔적은 이미 끝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떤 기다림......
동부팀 메뉴에는 오늘도 못 먹는 홍어가 또 나온다. 홍탁을 즐기는 우리 세대인데 아무리 웰빙이라 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식품임에 틀림없다. 탁주는 물론이거니와 홍어 역시 일단 냄새가 역겨워 먹지 못하는 이유다. 그래도 마시지 못하는 술이지만 따라놓고는 브라보 정도는 마실 수 있다는(포도주 반 컵 ㅎㅎ) 한 순배 돌고 두 순배 돌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는 점심상은 길어지기만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여기서 그만 끝내야 할 것 같은 예감이다(선배님들 지송 ㅎㅎ)
점심을 먹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비바람이 물러가고 좀처럼 맑아지지 않을 것 같은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다. 최근의 날씨가 가을인지 여름이지를 분간 못할 정도로 가을비를 내렸던 날씨 속에 푸른 하늘을 며칠씩 구름 속에서 은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떠 다니는 뭉개 구름과 함께 쪽빛 바다보다도 더 맑고 아름다운 파란하늘이 열린다 순수한 동심 어린 소년소녀마냥 모두가 하늘이 열린다 좋아라 한다. 산을 찾는 우리 모두는 나이를 떠나 순수한 마음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오누이의 대화......
왔던 길 다시 돌아 세석을 향해 간다. 더 넓은 세석의 하늘빛과 야생화의 꽃 길을 거닐고 싶어서다. 촛대봉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작은 계곡으로 변하니 길섶에 피어있는 용담과 습지에 군락을 이룬 고마리 비슷한 이름 모를 야생화와 산오이풀의 끝물를 알리는 소식과 함께 한창 피어나는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초 등의 청초한 야생화가 우리를 반긴다.
촛대봉에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이 저만큼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곳 촛대봉에서부터 가을이 점점 익어가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촛대봉의 가을 마중에서 동심의 어린이로 돌아가 한 쪽의 추억을 쌓고, 한 편의 추억을 기억의 창고에 담고 있는 중이다. 삶이 어려울때면 우리는 언젠가 기억의 적금통장에서 오늘의 아름다운 산행을 기억하리라.
촛대봉 주변 야생화에 흠뻑 빠져 있다가 저 멀리 산 그리메를 바라 본다. 저 넘어 남해 설흘산과 사천의 와룡산 등, 그리고 가깝게 백운산의 군락이 한눈에 들어 온다. 참~ 그렇게 멀리 있는 산군(山群)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러다가 일행 중 누군가 잘못 지명했다가 단번에 들통나는 산 꾼들이라 섣불리 모르는 산 이름을 거명하지 않는다(서북님 혼났지요 ㅋㅋ) 시간은 흘러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욕심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이왕 우리 모두에게 똑 같이 부여해준 인생의 시계를 최대한 늦춰보고 싶다. 그러나, 늦춰보는 인생은 있을지라도 버려지는 인생은 없어야겠지요.
아~ 열심히 꽃을 담고 있는 시간에 저들은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촛대봉능선을 따라가다 아쉬움에 뒤 돌아 보며 바라보는 풍경을 놓칠 수 없어 한 컷, 고도 800을 내리치는 사이에 어둠은 서서히 찾아 오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하는 사이에 벌써 종착지인 거림에 닿는다. 하루 종일 세상을 단절한 나는 버릇처럼 또 주머니에 손을 내민다. ‘일요일인데 무슨 전화가 이렇게 많이 왔지……’
청산 전 치 옥 씀 |
'智異山 戀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바론계곡과 세양골좌골 산행 (0) | 2010.10.08 |
---|---|
해지고 해뜨는 지리산 중봉에서 (0) | 2010.09.24 |
큰새개골 우골산행 (0) | 2010.09.09 |
만만찮은 목통골 산행 (0) | 2010.08.15 |
산정(山情)에 약한 사람(함박골과 막차이골) (0) | 2010.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