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한 사람(지리산 하봉)


-언제: 2010.10.13~14
-어디: 초암능~ 하봉(박)~ 천왕봉~ 소지봉~ 창암능~ 두지터~ 추성리
-누구: 산구화. 지다람. 서북능선. 야생마. 나


중봉으로 갈까
하봉으로 갈까
그것도 들 머리를 국골로 잡을까?
아니면 초암능선으로 잡을까
산행 아침에도 결정을 못 내리고 산행은 이어집니다.
일단 초암능을 올라 하봉을 거쳐 그 때 상황을 봐 가며 야영지를 결정하기로 하였지요.


이상하리만큼 내가 산에만 오면 날씨가 좋지 않다고 야단입니다.
황산에서도 그렇고
지난번 나바론 계곡 산행도 그렇고 오늘도 역시 진한 운해를 몰고 왔습니다.
안개 자욱한 아침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지리산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기다리는 오늘 그날이 왔어요~~ ♩♬♪♫(이하생략)
윤항기가 불렀던 “나는 행복합니다”를 읊조리며 산행 길을 나섭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만큼 곤경에 처해도 생각을 바꾸면 희망이 보인다지요.
안 되는 쪽으로만 생각하는데 어찌 될 일이 있겠는가
한없이 불행하더라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인다지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기회는 오지 않으니까……



초암능에도 고도 낮은 지역에서는 안개로 가라앉아 있다가 고도를 올릴수록 운해로 바뀐다.
좀처럼 걷힐 기미는 보이지 않은 안개지역을 거쳐 된비알로 고도를 올린다.
주변에 수 많은 알밤들이 우리를 유혹하지만 묵묵히 우리의 갈 길을 간다.
바람 한 점 없는 능선길을 걷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가을이다 지만 고도 1000 이하는 아직 단풍은 물들지 않았고 주변 풍광도 그렇다.
그래서인지 초암까지 가는 동안 날씨도 그렇고 해서 딱 사진 5컷 정도



초암을 거쳐 하봉까지 오르는 동안 운해는 앞을 가르고
그 아름다운 풍광은 볼 수 없었지만 우리가 지리산에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마음을 다 잡았기에 별 불만은 없었다.
다만, 오늘 우리와 동참한 야생마님은 어떤 마음을 먹고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가는 도중 적당한 안부에서 점심상을 차렸네요.
먹을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한 시간을 소비하는 점심상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산상만찬에서 또 하나의 작은 행복을 느끼며 저 능선 천왕의 모습을 바라 봅니다.
4시도 조금 못되어 하봉 근처에 닿았습니다만
잔뜩 낀 운해 때문에 주변 날씨가 초저녁을 연상케 한다.
어디 적당한 곳에서 우리들의 집을 짓기로 하고 물 당번은 물 길어 헬기장으로……



집 한 채를 지어놓고 운해 속의 모습을 보겠다고 적당한 암봉을 찾았다.
보이는 건 운무 속에 흔들리는 내 마음뿐
은근히 함께한 산 친구들에게 미안함이 몰려 옵니다.
오늘은 마음을 버리고 잊어버리자 하는 생각에 오히려 편하기만 합니다.
한참을 그렇게 노닥거리는 사이에 서쪽 하늘에 왠 광영이 비쳐 옵니다.
순간 잽싸게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언제 왔는지 일행 모두가 천왕봉 운해 춤사위를 보고 있네요
단 1분여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늘 그 모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네요.

사진제공: 야생마


가을밤의 밤 마중
밤이 깊어지자 고요하게 느껴졌던 좀 전의 가을 기운이 스산한 바람까지 불기 시작한다.
뻣뻣한 어깨 힘을 풀고 잔뜩 움츠리며 운해 가득한 반야를 바라 봅니다
잔잔한 고요 속의 평화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인 듯싶네요
쓰고 있는 겨울 털모자를 벗겨 드니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스산한 가을바람이 오히려 마음의 훈풍이 되어 우리의 가슴을 적십니다.
눈을 지긋이 감고 바람의 방향을 짚어 느껴봅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가 몸을 움츠리게 만들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가을에 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가을 타는 남자처럼……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피곤함이 몰려올 때 나는 조용히 그 자리를 비켜섰는데
함께한 산친구는 저무는 가을을 마음에 담고 앵글에 담아 보겠다고 부단히 도 움직이네요
까만 밤의 흑과 백의 조화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을 새삼 느껴 봅니다.




아침여명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 합니다.
좋지 않았던 어제의 날씨와는 아주 딴판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지리에서 여명은 언제나 새색시의 마음인양 두근거리지만 너무나 기대가 컸던지 실망도 큽니다
그렇지만 맑은 가을 하늘이 우리의 마음을 저울질 합니다.
허공달골을 향해 내려가자던 코스가 상봉을 향한 주능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혹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발걸음은 더욱더 가볍고 마음은 날아갈 듯싶습니다.
엊그제 다녀간 중봉에서 마지막 가는 가을 단풍을 노래 합니다.
해마다 삼사월이면 초록 잎새가 우리에게 끝없는 희망을 선물하고
5월 어느 날 빨주노초의 어여쁜 꽃에 가려 잎새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하더니
이제, 가을 잎새는 더 이상 조연이 아닌 가을의 주연이라고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 하네요



가을 하늘
가을 단풍
가을 사랑
그리고 한가지 더불어 지리 사랑
이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봉에서 제석봉까지 걸어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3시간을 오버해 버렸다.
그런데도 그렇게 지루함은 없고 박짐이 가벼움으로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일까.
은근히 또 함께하는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네요.
사진을 하면서 산행 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진데……
제석봉 길을 따라 내려 오면서도 단풍이 보이는 곳마다 우리는 와~ 하는 감탄사
단풍은 벌써 망바위를 지나 고도 1000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그 단풍의 향연 속에 내림 길을 재촉하며 어느덧 1박2일의 지리산의 꿈 같은 여정을 마칩니다.
함께 해 주신 산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산행기 입니다.



2010. 10. 14 “청산의 바람흔적”은 지리산 하봉에서
청산 전 치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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