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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캐치

서울 나들이(2)

by 청산전치옥 2007. 9. 20.

 

-창덕궁

서울 종로구 와룡동(臥龍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지정번호 사적 제122

지정연도 1963년 1월 18

소재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시대 조선

크기 면적 43 4877

종류 궁궐

 

1963 1 18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1405(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 4877㎡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태종 4)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돈화문

 

돈화문은 조선시대 5대 궁의 하나인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린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창덕궁을 다시 지으면서 문도 함께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의 앞쪽은 도로포장공사로 지면이 높아져 약간 묻혀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층 5칸 가운데 3칸은 2짝씩 문짝을 달았지만 양쪽 끝칸은 모두 벽을 쳐서 실제로 3칸만 이용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 13년(1413) 문에 동종(銅鐘)을 걸었다는 기사가 있다.

문에 종을 걸었다는 것은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지만, 지금 있는 문은 다시 세운 것이므로 실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돈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궁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세운 문루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진선문은 대문인 돈화문(敦化門) 다음에 나오는 일종의 중대문이다.

돈화문과 인정문 사이에 다시 한 번 문을 만들어 놓은 것은, 창덕궁 정전(正殿)인 인정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함이다. 

 

 

 

 

 인정문

 

 

인정전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다.

또한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였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태종 5년(1405)에 창덕궁을 세우면서 함께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4년(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2층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웠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밖으로 뻗친 부재 끝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오얏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던 무늬이다.

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다.

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장식을 잘 갖추고 있는 건물이다.  

 

 

 

 

 

 

선정문(宣政門)은 선정전의 남쪽에 있는 문으로 정면 3칸의 맞배 지붕 구조이다.

 회랑을 따라 선정전의 가운데 칸과 연결되어 있다.

 

 

 

 

 

 

선정전은 조선시대에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고 왕비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하던 곳이었다.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1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이곳은 임금님의 집무실이지만 왕비가 가끔 이용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왕비가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으며, 누에를 치는 행사도 하였다.

선정전의 기와는 청색 유리기와인데, 강화에서 육연 스님이 굽던 계열의 기와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다른 건물에도 있었다.

건물 안쪽은 탁 트여 있으며 바닥에는 붉은 색의 양탄자를 깔았고 천장에서 멋진 단청을 볼 수 있다.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고, 조선 중기 건축재료의 모습을 잘 남기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대조전은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이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을 비롯하여 인조·효종이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5년(140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었다.

1917년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을 헐어 이곳에 옮겨짓고 ‘대조전’이란 현판을 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차례에 걸쳐 다시 지었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 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어수문(漁水門)
 
   주합루로 들어가는 문의 이름은 '어수문'이다 '물고기와 물의 문'이라는 뜻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임금의 뜻 안에서 열심히 노력을 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

물고기가 높이 뛰어올라 등용문에 이르듯이 더욱 높이 뛰어올라 이 문으로 들어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실제로 주합루 앞의 부용지 동남방 모퉁이에 물에서 뛰어오르는 물고기 한 마리가 돌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어수문'은 임금님만이 드나드는 문이고, 신하들은 어수문 옆에 있는 허리를 굽혀야만 간신히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두 개의 문으로 드나들어야 했다. 왕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이 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일까? 그렇게 작게 만든 이유는 전해지지 않는다.

 

   어수문은 아름다운 문이다. 문 위에 어수문(漁水門)이라는 해서 고기들의 문이라고 해석이 된다.

물론 왕만이 다니는 문이지만 말이다. 어수문 앞에 오래된 향나무가 장식되어져 있다.

이는 아마도 어수문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 같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으로 사용되었던 창덕궁의 건물로 숙종 18년에 재건되었다.

영조가 친필로 기록한 현판이 걸려있으며,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으로 사용되었던 창덕궁의

건물로 숙종 18년에 재건되었다. 영조가 친필로 기록한 현판이 걸려있으며,

 건물 앞쪽에는 '춘당대'라는 마당이 있어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마지막 시험을 치룬 곳이나 창경궁의 담으로 막혀있다.

 

 

 애련지의 모습.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는 뜻인 애련지(愛蓮池)는 창덕궁 불로문(不老門)을 지나 왼쪽에 자리하고 있고,

애련지 북쪽에 서 있는 간결한 정자가 애련정(愛蓮亭)이다.

애련지는 부용지와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방지(方池)로, 사방을 장대석으로 쌓아올렸다.

입수구가 독특한데, 흘러내리는 도랑물을 물길을 따라 폭포수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원래는 연못 옆에 어수당(魚水堂)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애련정은 숙종 18년(1692)에 애련지의 물가에 지은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이익공의 사모지붕 양식을 띠고 있다.

일반 건물에 비해 추녀가 길며 추녀 끝에는 잉어 모양의 토수가 있다. 물 기운으로 불 기운을 막는다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것이다,

건물을 받치는 네 기둥 가운데 두 기둥은 연못 속에 잠겨 있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

 정자 사방으로 평난간을 둘렀는데, 낙양창 사이로 사계절이 변하는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애련’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가 쓴 ‘애련설(愛蓮設)’이라는 시에서 유래했다.

숙종이 지은 ‘애련정기(愛蓮亭記)’가 ‘궁궐지(宮闕志)’에 전한다.

 

 

 

 

 

 

 

 

 

 

 

연경당의 장단문

 

 

 장락문-연경당의 대문
장양문-사랑마당으로가는 대문
수인문-안마당으로 가는문
내당-안채 5.통벽문-반빗간으로 가는문
연경당-사랑채
선향재-서재

 

연경당에 대하여..
연경당은 순조가 왕세자 익종의 청으로 사대부집을 본떠 지은 99칸집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궁궐지’에는 120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경당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전형적인 구성과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오늘날 조선시대 후기의 한옥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연경당이 일반사대부가와 다른점은 그것이 궁궐안에 지어졌기 때문에 사당을 두지 않았으며,

안채 건물에는 부엌이 없고 대신 안채의 후면에 음식을 준비하는 반빗간이 설치된 것이다.


 

 

  

 

연경당에서

 

 

 

 

 

 

 

 

 

 

 창덕궁 숙장문의 모습

 

숙장문을 지나면 창덕궁 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숙장문 부근은 일제시대에 헐려 나가 화단으로 꾸며졌던 곳으로 1996년부터 복원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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