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2008.12.11
-어디를: 서북능선
-누구와: 산 친구들 6명


겨울산행은 언제나 그랬듯이 차 안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고문의 시간이다.
데워질 데로 데워진 온도를 벗어나 차가운 산 기온에 적응하려는 처음 그 시간
곧 바로 이어지는 산행에서 금방 몸은 데워질 텐데도
워밍업 시간의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겉옷을 걸쳐 입고 산길로 들어 선다.
엊저녁 일기예보를 보고 심상찮게 생각은 했지만
‘응~ 그래도 지리산이니까 고도를 높이면 눈이 오겠지’ 하면서 기대를 해 본다.


그러나 엊그제 순백의 향연인 천왕봉 산 길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진하게 가둬진 겨울안개가 걷히기를 바랄 뿐이고
또 다른 맛은 낙엽 쌓인 겨울 산의 등로에서 느끼는 운치를 찾을 수 있으리라.
청소년 수련장의 모습을 지나올 때 을씨년스런 감이 돌더니만
이내 숲 길로 들어 설 때 짙은 안개가 드리워진 자연의 모습을 보면서 한 컷


얼마 전에 울 동부팀들이 이곳을 다녀갔을 때 눈이 내려 이런 낙엽을 볼 수 없었겠지만
며칠간의 따뜻한 고온기온으로 주변에 낙엽 쌓인 등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갈색융단처럼 낙엽 쌓인 산길은 산길인지 분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냥 동심의 세계로 빠져 저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놀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태우지 않아도 향기 그윽한 낙엽 냄새가 우리들의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한 시간의 된비알을 끝내고 올라서니 세동치다.
평일이라 사방을 둘러봐도 등산객이 보이지 않는 산은 침묵한 채 조용히 엎드려있었고
조망이 트일만한 곳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 보지만 보이는 것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일 뿐
잠시 주변을 서성이다가 웃음을 내 뱉는다.
엊그제 저들이 이곳에서 밤을 세우며 돌리고 또 돌리는 술잔들
빙~ 둘러앉아 생의 흥겨움에 때로는 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노랫가락을 했을 텐데……
그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있는 모습에서 한참을 머물다 간다.



바람꽃이 피었다.
야무지게 여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를 맞이하는 서북이 바람꽃 시늉은 내준다.
아마 산책하는 듯 다녀간 우리 몇 사람의 허 접한 산 꾼들을 위해서
서 북사면에서 불어내는 습한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이내 상고대를 피워낸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금방 녹아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그래도 우리에게 섭섭하지 않게끔……



애초에 오늘 산행은 산책하듯 산행하기로 맘먹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지리산이라면 워낙 겁이 많다 보니
그들에게는 우주인듯한 신비의 지리산을 하나 하나 배워가는 견습생이다.
그런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아니면 또 다시 오라는 뜻이었는지 주변 조망이 꽝이다.
그래도 마냥 좋답니다.
산책하는 듯 다니는 편한 이 서북능선길이 특히 바래봉 가는 길이 얼마나 편했을까요?



부운치 조금 못 미쳐 적당한 곳에 점심상을 차렸다.
산행 중에 펼쳐진 점심상은 우리들의 미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색의 조화가 눈에 띈다.
토목아우의 낚지볶음과 생굴 그리고 삼겹살로 배를 채우고 나니 부러울 게 없었다.
엊그제 헝그리산행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가야 할 길은 가야 한다.
한동안 숨 고르기를 하고 나서 바래봉을 향해 간다.


철쭉과 만설이 내리면 우리가 가장 접근하기 쉬운 곳
그래서 누구나 산책하듯이 다가서는 이곳인데 함께하는 일행 중에는 처음이라는 바래봉
함께하는 M님이 바래봉 철쭉의 유래와 바래봉의 역사를 설명하신다.
언제 또 만들어졌는지 임도 주변으로 돌과 시멘트의 흔적으로 잘 정돈되어 있다.
겨울이지만 아직도 푸른 초원의 기미가 보이는 언덕 아래로
한가롭게 노니는 양들의 모습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 올 것만 같았다.


잠시 바래봉 정상에 섰다.
하나의 가림이 없이 모두를 드러내는 바래봉의 모습
덕두봉을 배경으로 기념 샷을 날리고 주변에 보이지 않은 지리의 조망을 마음에 담는다.
나무하나 막아서지 않은 정상 주변에 예전의 모습보다는 더 자란 주목이 푸르름을 즐긴다.
속세의 탐욕을 버리고, 마음을 완전히 비운 스님의 報施(보시)를 보는 것처럼……
이제 또다시 봄은 어김없이 올지어다.
따스한 봄기운을 받아 철쭉이 만개한 봄날이 아니더라도
서설이 내리는 북풍 한설에 아름다운 눈꽃잔치를 보러 가까운 시일 내 다시 널 찾으리라.
2008.12.12
청산의 바람흔적은 서북능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