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골 유래와 가을 단풍
-산행한 날: 2015. 10. 25
-어디를: 직전마을~ 피아골 산장
-나 홀로
피아골 하면 무엇 보다 떠오른 단어는 가을 단풍이다.
피아골 가을 단풍은 지리산 10경 중 하나인 이유도 그것이기 때문이지만
현재의 모습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피아골 단풍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도 구태여 해 년마다 피아골을 찾은 이유는 10경의 이유를 찾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우리네 민족사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은 이데올로기의 빨치산 이야기다.
피아골 등산로 입구에 선 안내판에는 ‘왜 피아골이라 불릴까요?’ 입 갑판이 있다
1)전쟁으로 인한 ‘피의 골짜기’
2)피난지로서 ‘피하는 골’
3피밭(직전=稷田)이 있는 골짜기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다.
해설판에는 지명 유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연곡사에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러 수행하여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
척박한 토양에도 잘 자라는 오곡(쌀·보리·조·콩·기장)중의 하나인 피(기장)을 많이 심어
배고픔을 달랬다는 데서 피밭골이라 부르던 것이 점차 변화되어 피아골로 불리게 됐다”는 것.
그래서 마을 이름 역시 기장직(稷), 밭전(田)자를 써서
직전마을이라 부른다는 부연설명이다.
반면 땅이름 연구가인 윤여정 단장님은
지난 2009년 펴낸 ‘대한민국 행정지명’에서 ‘비탈진 곳의 마을’의미인
빗골〉핏골〉피앗골〉피밭골로 변화된 것을 피밭을 취해 직전이라 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거두절미 하고
빨치산을 영화화한 [피아골]과 [남부군]은 이데올로기와 인간성과의 갈등을 정면으로
대담하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피아골 계곡마을에서 갓 결혼하여 신혼생활의 꿈에 젖었던 신랑이,
빨치산에 포섭되어 산 속으로 들어갔다.
기다림에 지친 새색시가 남편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여자 빨치산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체포되고 만다. 사형선고를 받지만, 남편을 찾으러 간 정상이
참작되어 감형을 받고 산 속 외딴 집에서 혼자 살다가 간 아픈 사연이,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도식적인 반공영화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 내면의 인간성의 모순과 본능을 파헤쳐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심도 있게 그려낸 작품이었던 것이다
왜 빨치산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싸움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을까.
빨치산의 무장투쟁은 해방 후 지배세력과 민중 사이에 벌어진 기나긴 대결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견해가 많지만 이제는 먼저 간 영혼들이 상처가 아물고 그들의
원한이 풀어져 편안히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해 년마다 10월이면 피아골 골짜기에는 많은 가을 풍류객들이 가을 단풍을 즐기고
있지만 이런 비극의 현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여 나름대로 적어 봤습니다.
201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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